[APY대관전시] 송도미미아트 <예술과 과학의 에스키스 展>
[APY 대관전시]
✔ 전시: 송도미미아트
<예술과 과학의 에스키스 展>
참여작가: 정혜원 채진옥 임혜진 김희경 황서현 신호수 구연방 권나영 구지연 최성은 강희경 임수경
✔ 날짜: 10.17.(화) - 10.31.(화)
*오픈: 10시-18시
*휴관: 10.22.(일), 10.29.(일)
✔ 장소: 아트플러그 연수 전시장
✨ 전시소개
"얽히고 설킨 세상, 두 개의 테이블"
- 글 김희경(미술심리학자)
세계를 설명하던 과학의 행간엔 예술이 존재해왔다. 과학과 예술은 세상을 바라보고, 상상하고, 연구하며 그간의 여정을 각자의 언어로 서술해왔다. 세상은 과학적으로 세워졌지만 예술적으로 흘러가고, 세계는 예술적으로 표현되지만 과학적으로 설명된다.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고 그 속에 온전히 존재하기 위해선 예술과 과학의 씨줄과 날줄로 지어진 느슨한 천 위에 서야 한다.
아서 에딩턴(Athur Eddington)은 ‘두 개의 테이블’이라는 개념을 통해 우리가 사는 세계가 얼마나 다르게 인식되고 설명될 수 있는지 보여줬다. 똑같이 복제된 두 개의 테이블에 대한 서술을 각각의 방식으로 접근한 것이다. 결과는 엉망이었다. 하나의 접근으로만 설명하기엔 세상의 본질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던 것이다.
과학적으로 접근한 테이블은 이렇다. 대부분이 비어있고, 그 공허 속은 엄청난 속도로 회전하며 돌진하는 수 많은 전자(Electron)들이 흩어져 있다. 채워진 곳은 자체의 부피의 십억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다. 그런데도 테이블 위에 올려둔 연필이 떨어지지 않는다. 과학적인 접근에서 테이블은 사물이라기 보다는 어떤 힘이 영향을 미치는 장으로 존재한다. 이는 우리가 그동안 테이블과 함께 살아온 무수한 경험을 분해시키고 우리의 또렷한 감각을 환각으로 만드는 처사이다. 실재성을 잃어버린 것이다.
예술적·실재적으로 접근한 테이블은 이렇다. 짙은 나무색이며 팔꿈치에 닿은 표면은 단단하고 차갑다. 밀어도 무너지지 않는다. 궁금했던 책을 읽을 때 기대어 앉아 책을 두던 믿음직스러운 사물이다. 궁리해가며 좋은 구절을 찾아 편지를 쓰던 추억을 함께한 정다운 친구이기도 하다. 이 테이블의 본질은 그동안의 감각적 경험들 속에 선명하게 녹아 있다. 테이블이 간직한 실체의 비밀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말이다. 대부분이 허공인 물체와 함께 그동안 알콩달콩 추억을 쌓아 온 것이다.
우리는 예술과 과학이 설명하는 모든 측면을 다 합쳐도 세상의 일부분만을 짐작해 볼 수 있을 뿐이다. 과학적으로 바라보기엔 세상이 너무나 비어있고, 예술적으로만 바라보기에는 너무나 관념적이다.
과학과 예술. 빈 공간 속 엄청난 속도로 돌진하는 전자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그런 역할이 되어 줄 거라는 기대를 가설로 삼았다. 둘의 만남이 더 풍요롭고, 더 납득 가능하며, 더욱더 본질적일 것이라 가정했다.
이 전시는 예술가의 ‘작가노트’와 과학자의 ‘가설노트’가 처음 만나 엉성하게 얽힌 형태의 에스키스로 시작됐다. 몇몇의 간담회와 심도 깊은 심포지엄을 통해 엉성했던 얽힘이 차차 견고하게 설켜지는 과정을 유기적으로 영상에 담았다. 그리고 그 가설의 결과물들이 마침내 벽에 걸렸다. 이토록 도전적이면서도 조심스러운 시도를 관람객의 느슨하고 따듯한 시선으로 담아주길 기대해 본다.
"예술과 과학이 서로 사랑을 할 때."
- 글 강희경(갤러리&라운지 관장)
1837년 프랑스 태생의 사진 발명가 다게르(Louis Jacques Mandé Daguerre 1787-1851)가 옥화은판(沃化銀版 : 아이오딘화은silver iodide을 바른 금속판에 빛을 비춘 다음,수은 증기를 보내면 상이 맺히는 은판사진법, 일명 다게레오타입 Daguerreotype)을 발표했을 때, 당대 이름이 널리 알려진 화가 폴 들라로슈(Paul Delaroche)는 “오늘을 마지막으로 회화는 죽었다! “라며 절망했다. 많은 화가들이 충격과 좌절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과학 기술의 발달로 예술가를 크게 혼란에 빠트린 사진의 출현은 이렇게 예술 생태계에 위협적인 반란을 꿈꾸고 있었다. 사진술은 회화의 재현 기능을 공격했고, 인물, 정물, 풍경, 역사적 증언 등 회화의 장르를 고스란히 모방하며 ‘더욱 리얼하게’ 사회 속에 빠르게 침투했다. 그리고 무한한 복제가 가능하다는 사진의 특성은 모더니즘 회화의 기반인 진실성(authenticity, 단 한 점의 진품)이라는 개념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서 예술 작품은 창조성, 천재성, 영원한 가치, 비밀, 신비주의에서 억지로 벗어나야 했으며, 단 하나 원본으로서의 ‘아우라’를 내던져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고야 말았다. 사진술이 발명된 지 20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과학과 예술로서의 둘의 관계 맺기는 어떠한가? 소설 ‘오만과 편견’(Pride and Prejudice)의 연인들이 그러하듯, 오해와 질투로 가득 찼던 시간이 가면서 사진과 회화는 상호 공존의 방법을 조금씩 타협하는가 싶더니 서로에게 조금씩 곁을 내주고는, 결국은 뜨거운 사랑에 빠졌다. 기계의 눈은 인간의 눈으로는 파악 할 수 없는 차원의 또 다른 현실 공간을 가시화했고, 회화는 사진 덕분에 눈으로 보는 것과 똑같이 재현해야 하는 강박관념에서 해방되었다. 회화는 점차 무의식이나 꿈, 빛이 없는 밤의 세계, 초현실적 상상, 더 나아가서는 추상으로 가는 길을 택하고 기꺼이 사진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예술을 전복하고 싶다던 사진술은 예술의 한 장르가 되었다. 예술적 목적을 위해 과학은 기꺼이 뮤즈가 되어 주었고, 과학 기술에 의해 잠식될 것만 같던 위기를 겪은 후, 예술은 완전히 다른 새로운 인간의 능력을 발견하는 영광을 얻었다. 결국 첫만남은 불완전하였지만 다양한 연결 고리들과 접점들, 그리고 다름을 인정한 채 수많은 서로에 대한 시도와 탐색을 하고 나서야 위대한 결과물이 만들어졌다. 둘은 이제 서로에 의지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다.
예술과 과학은 호기심에서 출발해 새로운 눈으로 가설을 세우고, 사물과 주변을 열렬히 탐구하고, 실험에 집요하게 매진한다는 점에서 서로 닮아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공통점은, 새로운 아이디어가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되고 받아들여지는 단계, 즉 치열한 소통 과정을 거친다는데 있다. 그 과정이 비록 신열을 겪을지라도! 현재의 눈부신 과학기술과 고도의 예술은 소통을 통한 다양한 접점들이 모여 발표되고 검증되었기에 위대하다. 예술과 과학의 에스키스 展은 과학과 예술이 왜 소통해야하고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그 속에서 어떠한 경이로운 생명이 피어날 수 있는지를 실험하는 습작 노트다. 다 함께 생각해보자고 펼쳐놓은 창의적인 초고이자 밑그림이고 일종의 설계도이다. 대작이 탄생하기 까지 무수히 많은 에스키스esquisse가 존재하듯이, 11인의 아티스트(혹은 과학자)가 내놓은 자유롭고 개성 넘치는 작업들을 통해 예술과 과학이 결합하는 지점을 즐거운 마음으로 함께 감상하고 탐구해 보았으면 한다.